1700년 한국불교의 정통법맥을 이어온 韓國佛敎 太古宗
부처님께서는 영원히 생사의 윤회고통(輪廻苦痛)를 벗어나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얻기 위해서 출가하셨습니다. 우리 또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고 받드는 것은 그 가르침을 배워 우리도 역시 생과 사를 초월하는 안심법문(安心法門)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수행이란 작게는 살아가는 동안의 고통을, 그리고 조금 넓게는 죽음의 두려움을, 그리고 크게는 생사의 윤회고통에서 벗어나 청정한 지혜를 얻어 궁극의 행복인 해탈의 대 자유를 얻기 위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닦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수행에는 참선(參禪), 염불(念佛), 간경(看經)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결국 삼매(三昧)의 체험을 통하여 자기의 마음을 밝히고, 자신의 진면목을 찾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참선(參禪)> 선(禪)은 고대 인도의 산스크리트어 ‘드야나(dhyana)’를 음사한 것으로 ‘고요히 생각한다’ 또는 ‘사유하여 닦는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옛 문헌에서는 사유수(思惟修)로 번역하였습니다. 따라서 참선이란 ‘깊이 사유하여 닦아감’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참선의 진정한 의미는 ‘본마음 · 참나’인 자성(自性)을 밝히는데 있습니다. ‘본마음 · 참나’ 는 어느 누구에게나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으며, 청정무구하여 일찍이 티끌세간 속에 있으면서도 물든 일이 없이 완전합니다. 참선은 이러한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에 관한 확고한 믿음과 인식에서 출발하여야 합니다. 즉 내가 본래 완벽하다는 데서 출발하는 수행인 것입니다. 따라서 완벽을 향해서 나아가는 수행, 즉 불완전한 나를 완전한 나로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본래 완전한 나를 확인해 나갈 따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참선으로 대표되는 수행법의 종류에는 여러 가지가 전해집니다. 태국, 스리랑카, 미얀마 등 동남아시아의 남방불교권에서는 ‘위빠사나(vipassana)’라는 수행법이 전해지고, 우리나라를 비롯한 중국, 일본 등 북방불교권에서는 선종의 화두(話頭)나 공안(公案)의 의미를 추구하는 ‘간화선(看話禪)’과 조용히 자신의 본성을 비추어보는 ‘묵조선(默照禪)’등의 수행법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1. 위빠사나 위빠사나는 약 2600년 전 부처님께서 진리를 깨달은 수행방법으로 지금 이 순간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있는 그대로 ‘Sati(알아차림)’하여 ‘무상’ ‘고’ ‘무아’의 지혜를 스스로 증득하여 영원한 해탈에 이르는 수행법입니다. 위빠사나는 팔리어로 ‘vipassana’ 영어로는 일반적으로‘insight’ 또는 ‘insight meditation’으로 번역하며, 뛰어나다(visesa)는 의미와 다양성(vividha)을 의미하는 접두사 vi에 ‘보다’라는 뜻을 지닌 ‘passati’라는 말의 명사형인 ‘passana’의 합성어입니다. 따라서 ‘vipassana’는 ‘뛰어난 봄’ ‘뛰어난 관찰’ ‘사물의 본성을 꿰뚫어 통찰함’ 등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無常, 苦, 無我라는 관점에서 모든 현상을 사실 그대로 관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우리가 “나”라고 집착하고 있는 몸과 마음의 모든 작용과 ‘오온(五蘊)’과, ‘육경(六境)’에 대한 알아차림 등 일상생활의 모든 영역을 수행의 대상으로 삼는 공부입니다. 오온이라는 대상을 관찰하면 그것이 덧없고, 실체가 없음을 깨닫게 되고 그리하여 집착과 갈애가 사라져서 마침내 마음이 만든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순수한 관찰과 알아차림을 통해 자신의 몸과 마음을 비롯한 일체대상이 한 순간도 고정됨이 없이 변하고 생멸하여 실체가 없음을 스스로 통찰하여 알아차리게 됩니다. 알아차림이란 대상으로부터 마음이 떠나지 않고, 대상이 일어남과 동시에 그것을 인식하는 강력하고 지속적인 관찰로서, 대상에 마음이 밀착하여 대상을 확고하게 잡되, 그 대상을 조작하거나 관리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관찰하는 것을 말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이처럼 모든 현상을 아무런 집착함 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위빠사나는 지금 이 순간 있는 것을 사실 그대로 관찰하고 알아차림 하여 현상에 내재되어 있는 실재를 명확히 통찰함으로써 마침내 근본 어리석음 즉 ‘무명(無明)’을 타파하여 열반을 이르도록 하는 수행을 말합니다. 2. 간화선(看話禪) 인도불교가 중국불교로 이어지면서 수행체계에서도 하나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이른바 ‘화두(話頭)’ 즉 ‘공안(公案)’의 출현인데 이는 하나의 문제를 의심을 그 본질로 하여 깊이 참구함으로써 마침내 깨달음을 획득하게 하는 간화선으로의 전개인 것입니다. 이 수행은 화두를 통해서 수행자로 하여금 큰 의심을 일으키게 하고 스스로 그 의심을 해결하여 결국 ‘무명(無明)’을 타파하여 깨달음을 얻게 하는 수행법입니다. 종래의 인도불교의 선정수행은 4성제, 8정도, 12연기 등의 교리적 의미를 수행자가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데 비하여, 중국의 선종에서는 언어보다는 그 이면에 숨겨져 있는 실상(實相)의 정확한 의미를 곧바로 찾아 들어가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따라서 간화선은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 하여 경전의 가르침에 밖에 따로 전하여 오는 길이 있음을 강조합니다. 중국의 선종은 ‘마음을 바로보아 본성을 깨치면 부처를 이룬다(直指人心見性成佛)’는 사상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520년 달마대사가 인도로부터 중국에 전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렇게 인도의 선이 중국에 전해지면서 중국적인 것으로 면모가 바뀌어 종단 조직을 형성하게 되었고 점차 발전하면서 6조가 되는 혜능(慧能)대사 이후에 크게 일어나 여러 계파가 생기고 9세기 에서 11세기 사이에는 5가(家) 7종(種)의 여러 파에서 선풍을 크게 떨쳤습니다. 이 중에서 남송(南宋)이후에 이르러서는 조동종의 광지전각(廣智正覺)선사가 묵조선(默照禪)을 널리 펴고, 임제종에서는 대혜종고(大慧宗高)선사가 간화선(看話禪)을 크게 고취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선법은 역사적으로 보면 신라의 법랑(法郞)대사가 달마로부터 4조인 도신(道信)선사에게서 최초로 법을 받았는데 이는 북송(北宋)의 선인 조동종의 묵조선을 위주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6조 혜능(慧能)대사로부터 남악(南嶽)·마조(馬祖)·백장(百丈)·황벽(黃檗)선사의 법맥이 임제(臨濟)의현(義玄)선사에 이르러 일가(一家)를 이루게 되었는데 이 임제종의 간화선이 신라시대 보조국사를 거쳐 태고보우국사를 통해서 비로소 한국불교 선종의 가풍으로 확립하게 되었고 현재까지 이어져 한국선불교의 대표적인 수행법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
<염불(念佛)> 불교는 중생의 능력과 근기에 맞는 다양한 수행법이 있습니다. 염불이란 일반적으로 마음속으로 부처님을 항상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흔히 주위에서 ‘나무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나무석가모니불’등 부처님을 부르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부처님께 귀의하고 모든 것을 부처님의 뜻에 따라 수행하는 것이 염불입니다. 염불에는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진리를 생각하는 ‘법신(法身)염불’과 부처님의 공덕이나 모습을 마음에 그려보는 ‘관상(觀象)염불’, 그리고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칭명(稱名)염불’이 있습니다. 염불하는 방법은 부처님을 그리워하면서 명호를 지극히 부르는 것입니다. 즉 언제나 부처님과 함께 하며 살기를 발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염불을 하면서 자신의 소리를 언제나 생생하게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이 산란해져 입으로는 염불을 하면서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게 됩니다. 부처님을 부르는 동작 하나에도 정신을 모아 흐트러짐이 없는 상태가 진정한 염불인 것입니다. 지극 정성으로 염불하면서 부처님을 친견하고, 몸에서 빛을 발하는 방광(放光)을 얻었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보다 진심으로 부처님을 그리워하고 생각하는 과정에서 마음에 사심이나 탐욕이 사라지는 경지를 체험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대승경전에서는 삼매에 들어 염불하는 염불삼매를 설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염불은 죄를 없애고 삼매 중에 부처님을 친견하는 것은 물론, 부처님의 나라에 태어나길 발원하면 반드시 태어난다(念佛往生)고 합니다. 그래서 《아미타경》에서는 깨달음을 이루지 못한 사람이라도 임종할 때 일념으로 아미타불을 열 번만 부르면 서방정토에 왕생한다고 하였습니다. 염불은 쉽게 행할 수 있는 수행법으로서 대중의 호응이 높았습니다. 어려운 교리를 선호하는 공부를 하지 않아도 극락왕생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일반대중이 선호하는 것입니다. 신라시대의 원효스님이 ‘나무아미타불’을 지성으로 부르면 극락에 왕생할 수 있다고 무애박을 두드리며 가르치신 이래 염불은 지금까지 불교인의 수행법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
<간경 ‧ 독경(看經 讀經)> 간경은 경전을 읽고 듣고 옮겨쓰는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두루 익힘으로써, 수행자로 하여금 마음에서 허물이 생기는 것을 막아주고 바른 길로 인도하는 수행법입니다. 즉, 간경은 경전을 통해 불법을 공부하는 것으로, 생각으로만 부처님의 말씀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생활을 통해 그 말씀이 몸과 마음에 배도록 하는 수행인 것입니다. 따라서 간경수행자는 진리를 익혀, 안으로는 끊임없이 마음을 향하고 밖으로는 끊임없이 행실을 가다듬도록 해야 합니다. 선가구감에서는 "경을 보면서 마음속을 향해 공부하지 않는다면, 만 권의 글을 모두 보아도 아무런 이익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경을 보면서 마음으로 살피고 올바르게 실천하여야만 진정한 간경수행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본래 간경(看經)은 소리를 내지 않고 경문을 읽는 것이고 독경(讀經)은 소리를 내어 경문을 읽는 것이지만 차츰 같은 의미로 쓰이게 되었습니다. 경전은 바른 삶의 길을 제시하는 지혜의 창고이며 중생들에게 깨달음의 길을 널리 펴고자 하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경전을 읽고 외우며 몸에 지님으로써 얻게 되는 공덕이 무한히 크기 때문에 간경 또한 수행의 한 방법으로 정착되었습니다. |
<정근(精勤)> 정근은 선법(善法)을 더욱 자라게 하고, 악법(惡法)을 멀리하려고 부지런히 쉬지 않고 수행한다는 뜻입니다. 이는 염불과 같이 한 마음 한 뜻으로 불 · 보살님의 지혜와 공덕을 찬탄하면서 그 명호를 부르며 정진하는 것을 말합니다. 정근을 할 때에는 다른 생각을 다 놓아 버리고 오직 평온한 마음으로 부처님의 한량없는 공덕을 믿고 일념으로 정진해야 합니다. 불 · 보살님의 명호를 부르면서 그 명호에 집착하거나, 무엇인가 얻으려고 하면 오히려 정근에 장애가 됩니다. 항상 자세를 바르게 하고 기운을 안정시켜 몸을 흔들거나 경거망동하지 말아야 하며, 음성은 너무 크게도 작게도 하지 말고 기운을 적당하게 하여 고르게 해야 합니다. 정근할 때 마음을 안정시키는 방법의 하나로 염주를 돌리거나 절을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정근은 대상과 일정한 시간을 정하여 할 수도 있습니다. 대개 아침과 저녁으로 예불을 모시 때에는 석가모니불 또는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부르며 정근를 하고, 부처님의 위신력에 의해서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발원할 때는 나무아미타불 명호를 부르며 정근을 합니다. |
<진언(眞言)> 진실하여 거짓됨이 없는 불교의 비밀스러운 주문. 주(呪), 신주(神呪), 밀언(密言)이라고도 합니다. 의역하면 총지(摠持), 능지(能持), 능차(能遮)라고 합니다. 총지(總持)는 모든 악한 법(法)을 버리고 한량없이 좋은 법(法)을 다 지니게 한다는 뜻이며 능차(能遮)란 어떠한 악법도 능히 막아준다는 의미입니다. 다라니 수행은 밀교(密敎)에서 중시되었는데 다라니와 진언을 염송하면 번뇌망상을 깨뜨리고 나아가 자심(自心)을 깨달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관세음보살육자진언(觀世音菩薩六字眞言)’과 광명진언(光明眞言)등의 염송은 대표적인 진언수행의 한 방법입니다. 다라니는 신비성과 영성(靈性)을 간직하기 위해 번역하지 않고 사용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일반적으로 긴 주문을 ‘다라니’라고 부르고 이에 반해 짧은 주문은 ‘만트라’ 즉 ‘진언(眞言)’이라 하며 한자나 두자는 ‘주(呪)’라고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