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0년 한국불교의 정통법맥을 이어온 韓國佛敎 太古宗
대승불교의성립 부처님은 사람들의 근기(根器: 사람들 각자가 가진 성품에 따라 법을 받아들이는 것이 다르다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어떤 것을 이해할 때도 개인에 따라 그 차이가 나타남을 말하는 것입니다.)를 살펴보아 그에게 알맞은 설법을 하였기 때문에 서로 다른 근기를 가진 사람들이 보았을 때 부처님의 설법은 많은 단편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부처님의 법을 체계화하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러한 생각을 말해 주는 것이 아비달마 교학이었습니다. 부파불교의 이러한 아비달마 교학은 부처님의 근본교설(아함)을 체계화 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부처님의 교설을 아함에 한정시키고 어려운 해석으로 부처님이 설하신 법을 더욱 이해하기 어렵고 무의미한 불교로 만들어 갔습니다. 또한 부파불교에서는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을 ‘무위열반’에 있는 것으로 이해하였고, 이상적인 인간상은 그러한 열반을 얻는 아라한(阿羅漢)으로 인식하였습니다. 이러한 부파불교의 인간상과 수행상은 전문적으로 수행을 하는 출가한 승려들이 아니고서는 제대로 행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또한 출가한 승려들로부터의 교화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재가 신도들은 부처님의 유골을 모신 불탑(佛塔)을 중심으로 모여 부처님에 대한 동경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출가자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본으로 하여 교단을 지켜 온 것과는 반대로, 불탑을 지켜온 재가 신도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의 내용보다도 과거에 생존해 있던 부처님에 대한 동경을 신앙의 원천으로 삼아왔던 것입니다. 이처럼 부파불교가 어려운 수행과 이해하기 어려운 교리로 대중으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을 때 여러 파로 갈라져 자파(自派)의 주장만이 최상의 것이라고 고집하여 온 불교의 자세를 맹렬히 비판하고, 재래불교를 소승(小乘:Hinayana)이라 폄하(貶下)하는 한편, 대승(大乘)이라고 칭하면서 이타적(利他的)인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불교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바로 대승불교의 시작이었습니다. 이 ‘대승’의 어원은 큰 수레, 즉 많은 사람을 구제하여 태우는 큰 수레라는 뜻으로, 일체중생(一切衆生)의 제도(濟度)를 그 목표로 하였습니다. 이 운동은 종래에 출가자만의 종교였던 불교를 널리 민중에게까지 개방하려는 재가자(在家者)를 포함한 진보적 사상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났던 것으로,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불교 유적인 스투파(stupa:墳墓)를 관리하고 있던 사람들이 중심이 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이 새로운 불교운동은 일체중생의 성불(成佛)가능성을 인정함으로써 일체중생을 모두 보살로 보고, 자기만의 구제보다는 이타(利他)를 지향하는 보살의 역할을 그 이상(理想)으로 삼고 광범위한 활동을 펴 나갔습니다. 자신만이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남도 함께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하는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보살도를 지향하는 것을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대승불교가 일어나면서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열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불(成佛)에 있게 되는 것이며, 이것이야 말로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하신 불교의 진정한 뜻이라고 보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일어난 대승불교는 일반 재가 신도들을 포함하는 사상으로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받았으며, 반야경, 법화경, 화엄경, 유마경 정토삼부경 등의 경전이 이루어져 종래의 불교를 일신하는 이 새로운 불교운동을 뒷받침하였습니다. 이 경전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 대승이 불교의 중심세력이 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져 대승불교의 사상적 기반을 확립하였습니다. 대승불교는 중국의 한(漢)나라 때 건너와 몽골, 티베트 등 이른바 ‘북방불교(北方佛敎)’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고 우리나라에는 고구려 문자왕(文咨王:491∼518) 때 용수(龍樹)스님의 《중관론(中觀論)》등 삼론(三論)을 비롯한 천태(天台), 열반(涅槃) 등의 교법이 들어와 대승불교에 대한 연구 및 교화가 활발하게 전개 되었으며 삼론을 바탕으로 한 삼론종(三論宗)이 개종(開宗)하는 등의 한국에서의 대승불교는 독자적인 발전의 단계까지 이르렀습니다. |
대승보살도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 중생이 가없어도 건지고야 말리라. 번뇌무변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 번뇌가 끝없어도 끊고서야 말리라. 법문무량서원학(法門無量誓願學) 법문이 한없어도 배우고야 말리라. 불도무상서원성(佛道無上誓願成) 불도가 위없어도 이루고야 말리라. 이는 부처님과 같은 깨달음을 얻는 것이 보살의 지상과제이겠지만, 그보다도 먼저 중생을 제도하겠다 는 뜻을 뚜렷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보살의 수행을 흔히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한다(上求菩提 下化衆生)"는 말로 표현하는데 이 말은 먼저 깨달음을 얻은 다음에 중생을 교화한다는 뜻이 아니라 깨달음을 구하는 일이 곧 중생을 교화하는 일이며, 중생을 교화하는 일이 곧 깨달음을 구하는 것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장보살과 같은 보살은 지옥에서 고통 받고 있는 모든 중생을 제도하기 전에는 결코 성불하지 않겠다고 서원하고 있으며, 법장비구(아미타불의 前身)의 48서원에는 자신이 비록 부처가 된다고 하더라고 괴로운 중생에게 깨달음을 열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결코 깨달음을 얻지 않겠노라는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육바라밀(六波羅蜜) 아라한은 오로지 자기의 완성을 위해 수행하는 것에 비하여 보살은 보살의 자각으로부터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수행이 시작됩니다. 이른바 불타(佛陀)는 중생을 구제하는 성인으로 대자대비의 소유자입니다. 그 불타가 되고자 하는 보살의 수행은 필연적으로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며 남을 이롭게 하는 이타행(利他行)의 실천이 자기 수행을 완성하는 길인 것입니다. 대표적인 보살의 수행덕목 으로는 육바라밀(六波羅蜜)을 들 수 있습니다. 여기서 바라밀이란 피안(彼岸)의 경지에 이르고자 하는 보살 수행을 나타내는 것으로써 이 말의 의미는 ‘피안에 이른 상태’ 혹은 ‘최상의 상태’ 즉 완성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육바라밀에는 다음과 같이 여섯 가지가 있다. ① 보시(布施 dana)바라밀 자신의 모든 것을 중생들에게 조건 없이 베풀면서도 무엇을 주었다는 생각마저 버림으로써 자신의 탐심(貪心)을 끊고 집착을 떠나며 타인의 괴로움을 없애주는 윤리적 실천수행입니다. 〈금강경 金剛經〉에서는 보시의 구성요소인 베푸는 자(施者), 받는 자(受者), 그리고 베푸는 내용이 되는 것(施物)의 3가지 모두가 공(空)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보시는 일반적으로 재보시(財布施), 법보시(法布施), 무외시(無畏施)의 세가지로 나누어지는데 재보시란 자신이 소유한 물질적인 것을 중생들에게 아낌없이 베풀어주는 것이고, 법보시는 모든 중생들이 열반에 들도록 불법(佛法)을 설하여 선근(善根)을 증장시키는 것이며, 무외시는 스스로 계를 지키며 남을 해하지 않고 일체 중생을 두려움에서 구하여 제도(濟度)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② 지계(持戒 sila)바라밀 재가(在家)와 출가(出家), 대승과 소승의 모든 계(戒)와 율(律)을 잘 지켜 악업(惡業)을 멸하고 몸과 마음의 청정을 얻는 것을 말합니다. 〈마하반야바라밀경〉에서는 스스로 십악업(十惡業)을 짓지 않고 십선도(十善道)를 행하며 또한 남들이 십선도를 행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지계바라밀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③ 인욕(忍辱 ksanti)바라밀 인욕이란 참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타인으로부터 받는 모든 박해와 고통을 잘 참고 나아가 그것을 받아들여 원한과 노여움을 없애고 제법(諸法)을 밝게 관찰하여 마음이 안주(安住)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④ 정진(精進 virya)바라밀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선행과 바라밀을 힘써 실천하여 나태한 마음을 버리고 선법(善法)을 닦아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정(精)은 순일무잡(純一無雜)을 뜻하고 진(進)은 용맹무퇴를 의미합니다. 보통 중생의 정진은 본질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지만, 보살의 정진은 집착함이 없는 이타의 정신에서 비롯한다고 합니다. ⑤ 선정(禪定 dhyana)바라밀 마음이 산란해지는 것을 멈추고 마음을 한 곳에 모아 진리를 바르게 사유하는 수행입니다. 세계 실상이 무자성(無自性)이고 공(空)한 것임을 삼매로서 직관하여 그것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는 수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⑥ 반야(般若 prajna)바라밀 일체법(一切法)의 자성(自性)이 공(空)함을 깨달아 진여실상(眞如實相)을 바로 보는 지혜의 완성을 말합니다. 반야바라밀은 모든 부처의 어머니로 표현되며, 앞의 5바라밀 수행의 바탕이 되며 또한 모든 분별지(分別知)를 떠난 궁극적인 지혜이므로 말로도 설명할 수 없고 깨닫지 못한 자의 생각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은 '얻는 바가 없다'(無所得)라고 말하여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보살의 바라밀수행은 자신의 이익을 구하지 않고 오로지 이타에 전력하며 성불도 도모하지 않는 끊임없는 수행이기 때문에 이 수행으로 나아가는 데에는 대단한 결의가 필요합니다. 보살의 이 결의를 갑옷을 입고 싸움터에 나가는 전사에 비유하여 ‘큰 서원(弘誓)의 갑옷(大鎧)을 입는다’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
공사상 공(空)이란 용어의 원어는 ‘sunya’로서 본래 ‘부풀어 오른’, ‘속이 텅 빈’등을 의미하여 ‘비어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러한 의미를 가진 말이 중국에 와서 공(空)으로 한역되었고, 특히 <반야경>을 중심으로 한 대승불교에 이르러 불교사상의 근본적인 개념으로 다루어게 되었습니다. 이 공의 의미를 본격적으로 취급하여 사상적인 관점에서 논의한 것을 공사상이라 하는데 특히 대승불교에서 이러한 공사상을 강조한 사람들을 ‘공론자(空論者)’라 부르고, 그들의 주장을 ‘공론(空論)’이라 하였습니다. <반야경>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어지는 공사상은 후에 용수(龍樹)대사에 이르러 철학적 체계를 가지고 대승불교 철학을 발생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용수대사는 공의 개념이 불타(佛陀)가 깨달은 연기법의 이치와 일치하고 공은 곧 무자성(無自性)인 것을 분명히 밝히고 <중론 中論>을 저술하여 <반야경>에 나타나는 공사상의 이론적 체계를 수립하고 그 근거를 명확히 제시하고 있습니다. <중론> 제24장 18게에서 ‘무릇 연기하고 있는 것, 그것을 우리들은 공성(空性)이라 설한다. 그것은 임의로 시설되어진 것이며, 그것은 중도(中道) 그 자체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게송에서 용수대사는 <반야경>에서 공이라고 설했던 것은 그것이 바로 연기를 전제로 하고 있는 것임을 명확히 밝히고 있습니다. 모든 사물이 각기 독자적인 존재의 것이 아니라 상호 의존적인 연기의 관계로 이루어졌으며 이러한 연기의 관계로 이루어진 까닭에 연기의 관계를 떠나있는 독자적인 성질로서 자성(自性)이나 실체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곧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인과 연의 상호관계로 생겨나는 것이고 따라서 그와 같은 것은 곧 자성이 없는 까닭에 공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체가 공하다는 관찰은 반야바라밀을 실천하여 얻어지는 것으로 이것은 세간의 일반적인 인식단계가 아니라 지혜의 완성에 도달한 경지에서 얻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반야경>은 법의 공을 주장하고 있으며, 공관은 바로 반야바라밀의 경지에서 얻어지는 지혜인 것입니다. |
유식사상(唯識思想) 유식학은 인도의 무착(無着:301-390년), 세친(世親:320-400)대사 등에 의해 성립되었으며 인도 유식사상을 담고 있는 대표적인 경론으로는 해심밀경(解心密經), 입능가경(入楞伽經),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 성유식론(成唯識論)등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유식이란 글자 그대로 오직 식(識)만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마음뿐이고 외적사물은 식이 변하여 나타난 마음의 그림자라고 보는 것입니다(唯識所變). 우리들이 사물을 볼 때 눈앞에 있는 것이 실재이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본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러한 고정적인 것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우리들의 마음에 의해 보이는 것, 주관과 객관의 관계로 존재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 유식의 의미입니다. 대승불교에서는 진여를 바탕으로 하여 마음의 모습을 이루고 있는 것을 심상(心相)이라고 하는데 이 심상의 의식을 다음과 같이 팔식(八識)으로 구분하여 나타내고 있습니다. 1. 전오식(前五識) 전오식은 아래의 기본적인 다섯 가지 인식을 뜻합니다. 이들 오식(五識)은 육체상의 조직인 감각기관에 의하여 활동하며 그 의지처(根)가 다르고 인식의 대상(境)이 다를 뿐 여타의 성질은 거의 같습니다. 이 오식은 직접적으로 우리의 오관(五官)을 통하여 객관계의 대상을 인식하는 마음들로서 우리가 생활하면서 능히 체험할 수 있는 정신영역입니다. 그러나 이들 오식은 식별의 능력을 갖고 있기는 하나 그 대상의 오묘한 내용까지를 잘 관찰하여 선악의 구별과 가치를 정할 수 있는 능력은 부족합니다. 여기에는 반드시 제육식인 의식(意識)이 가담하여야 만이 대상의 내용 인식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① 안식(眼識) 눈에 의해 색을 구별하는 마음 ② 이식(耳識) 귀에 의해 인식의 소리를 듣는 마음 ③ 비식(鼻識) 코에 의해 냄새 맡는 마음 ④ 설식(舌識) 혀에 의해 맛을 식별하는 마음 ⑤ 신식(身識) 몸의 느낌에 의해 촉감을 식별하는 마음 2. 제육식(第六識) 의식(意識)이라고 하며 위 전 오식에 의지하여 인식작용을 일으킵니다. 우리가 흔히 의식하고 사고(思考)하고 각종 정신작용에 사용하는 거의 모든 우리가 인지하고 있는 사고 작용의 대부분이 모두 제육식인 의식의 작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의식은 전오식에 의하여 식별되는 대상을 다시 확인하여 최종적으로 판단하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현재와 과거에 생각하고 느꼈던 일들이나 잠을 잘 때 나타나는 꿈의 역할도 하며 의식에서 나타나는 모든 장애와 번뇌를 정화한 가운데 항상 안정하고 청정하게 나타나는 정신작용의 역할도 합니다. 이와 같이 의식(意識)은 물질과, 정신계 그리고 부정(不淨)과, 청정(淸淨)의 세계를 모두 대상으로 하여 인식하고 증득하기 때문에 그 활동범위가 모든 심식(心識) 가운데서 가장 넓습니다. 그리하여 광연의식(廣緣意識)이라고도 부릅니다. 3. 제칠식(第七識) 말나식(末那識)이라고 합니다. ‘말나(manas)’라는 말은 곧 의(意)라는 뜻으로서 이를 의역하면 사량(思量)의 뜻이 있습니다. 사량이라는 말은 단순히 생각하고 ‘양탁(量度)’한다는 뜻도 있지만 항상 그릇되게 인식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즉 어떤 진리를 인식할 때 항상 그릇되게 인식한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이 말나식은 모든 감각이나 의식을 통괄하여 자기라는 의식을 낳게 하는 마음의 작용이며 객관의 사물을 자아로 여겨 모든 미망(迷妄)의 근원이 되는 잘못된 인식 작용을 갖게 하는 심식(心識)입니다. 또한 말나식은 여타의 식(識)보다 지속적으로 사량의 작용을 야기하여 사량식이라고도 합니다. 안식(眼識) 등 전5식은 사량하기는 하나 심세(審細)하게 사량하는 작용은 하지 못하며 제육의식(意識)은 심세(審細)한 사량심은 야기하나 그 심체의 의식작용이 가끔 단절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제팔식 아라야식은 그 체성과 작용이 항상 지속되기는 하지만 그러나 심세한 사량의 작용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나식은 지속과 심세한 사량 가운데 하나라도 결여됨이 없이 모두 구족하여 아라야식과 같이 삼계를 윤회하는 도중이나 어떠한 극한 상황에 처할 때나 상관없이 항상 그 작용이 단절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량할 때도 아주 세밀하게 사량하는 심세(審細)의 뜻도 함께 지니고 있어 근본번뇌에 해당하는 사량(思量)의 작용을 추호도 단절됨이 없이 범부로서 삼계육도에 윤회하고 있는 동안은 항상 심세한 사량심을 야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7말나식은 여타의 심식에 없는 조건을 다 구비하여 사량의 작용을 항상 야기하고 있습니다. 또한 어떤 식이든 심식은 인식의 대상을 요하게 되는데 이 말나식은 아라야식을 인식의 대상으로 하여 사량하고 번뇌를 야기하게 되는데 세친대사의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게송이 있습니다. “다음의 제이능변(第二能變)인 이 식을 말나라고 이름한다(是識名末那). 말나식은 저 아라야식(阿賴耶識)에 의지하여 전변하고 저 아라야식을 다시 반연하여(依彼轉緣彼) 사량하는 것으로서 성과 상을 삼는다(思量爲性相).” 즉 말나식은 아라야식을 모체로 하여 그에 의지하여 독립되어 나타나며 자체의 기능을 능히 변전(變轉)하는 식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태(母胎)에서 아라야식이 능히 최초로 변화하여 인간의 모습을 갖출 때 이를 초능변식(初能變識)이라 하고 다음 아라야식에 의지하여 두 번째로 나타나 심식의 본능을 발휘하기 시작하는 심식을 말나식이라 하며 이를 제이능변식(第二能變識)이라고 이름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말나식은 아라야식에 의지하여 전생(轉生)해 가지고 다시 인식의 대상으로서 아라야식을 진정한 자아(自我)로 반연(緣彼)하여 사량하고 영원한 진리이며 중도(中道)의 경지에 있는 무아(無我)의 진리를 문득 망각하고 전도심(顚倒心)을 야기하여 인간의 마음 깊이 자리 잡고 있으면서 항상 아치(我痴)와 아견(我見)과 아만(我慢)과 아애(我愛) 등 4가지 번뇌(四煩惱)를 주야로 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식학에서는 번뇌의 근원을 이 말나식에 두고 있습니다. 4. 제팔식(第八識)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고 합니다. 아뢰야식은 ‘alaya’의 음사(音寫)입니다. alaya에는 저장하는 곳 이라는 의미와, 집착의 대상이라는 의미의 두 가지가 있습니다. 아뢰야식 속에는 모든 과거 행위의 영향이 종자의 형태로 저장되어 있으므로 저장하는 곳 이라는 의미가 되며, 제7식인 말라식이 아뢰야식을 자아(自我)라고 집착하기 때문에 집착의 대상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한편으로는 아뢰야식 속에 모든 종자(種子)가 들어 있기 때문에 모든 종자를 가진 것이라 하여 ‘일체종자식’이라고도 부릅니다. 아뢰야식은 매우 미세한 심층심리이기 때문에 일상의식으로는 그 활동을 지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온갖 인식의 행위를 훈습(薰習)하여 저장하는 작용을 하며, 미래의 업을 일으키는 행위의 씨앗을 형성합니다. 이처럼 아뢰야식은 모든 ‘업력종자’를 보존하면서 업력을 발동케 하여 현재와 미래에 모든 행위의 과보를 가져오게 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뢰야식 그 자체가 능히 번뇌를 야기하여 진여(眞如)를 집착하는 작용은 갖고 있지 않으며 동시에 제6식인 의식 등 전 7식이 조성한 종자를 능히 보존할지언정 아라야식 자체가 악업을 야기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아뢰야식은 고정적 실체가 아니라 찰나마다 멸하고 생하며 상속(相續)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렇듯 아뢰야식이 계속 활동하고 있는 한 우리는 생사를 반복하면서 계속 윤회해 갈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 해탈하고자 한다면 먼저 마음의 정화가 선행되어야 하며 자리이타의 보살행과 사성제와 팔정도 및 지속적인 십바라밀의 수행등을 통하여 중생의 유식을 청정한 진여본성으로 전환 시켜 부처님의 지혜를 증득하여야 할 것입니다. |
화엄사상 화엄경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의 약칭으로 이를 줄여 《화엄경》이라 부릅니다. 또한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후 2ㆍ7일에 설한 경이며, 중생들의 근기를 고려하지 않고 깨달음의 내용을 그대로 설한 해인삼매정중설(海印三昧定中說)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대방광불화엄경의 대(大)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초월한 절대의 대이며 방광(方廣)이란 넓음 그래서 ‘대방광'이란 크고 넓다는 뜻으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절대적인 부처님를 수식하는 형용사이입니다. 화엄(華嚴)이란 잡화엄식(雜華嚴飾)에서 나온 말로, 말 그대로 갖가지의 꽃을 가지고 장엄한다는 뜻입니다. 화엄경은 세 종류의 판본이 전해 오고 있는데 현재 유통되고 있는 경전의 한역본으로는 60권, 80권, 40권으로 된 <육십화엄>, <팔십화엄>, <사십화엄>이 있습니다. 이중 <육십화엄>은 중국 동진시대에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에 의해 번역되었고 교정을 거쳐 421년에 역출되었는데 이를 진본(晋本)이라 하고 또는 화엄대경 중 먼저 번역되었다고 하여 구경(舊經)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리고 40권 <화엄경>은 일부만이 번역되어 있어 완역본이라고는 볼 수 없고 우리가 주로 대하는 경전은 권수가 60권, 80권인 화엄경입니다. 중국 화엄종의 초조(初祖)는 두순(杜順, 557~640)스님으로 비록 이설(異說)은 있지만 법계관문(法界觀門)에서 그의 사상적 입장을 전하고 있습니다. 지엄(智儼, 602~668)스님은 두순스님의 법맥을 잇고, 화엄교학의 대성자 법장스님을 길러낸 과도기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법장(法藏, 643~712)스님은 제3조로 알려져 있지만, 실질적으로 화엄교학을 체계화하신 분입니다. 법장스님이 세운 오교십종판(五敎十宗判)은 물론이거니와 법계연기(法界緣起), 성기사상(性起思想), 육상원융(六相圓融) 등 그 어느 것도 화엄의 지상성(至上性)을 드러내기 위한 교리들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후 당나라때 징관(澄觀, 738~839), 종밀(宗密, 780~841) 두 스님에 이르러 화엄교학은 거의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청량대사 징관스님은 화엄의 법계연기(法界緣起)의 교의를 ‘사종법계(四種法界)’로 체계화했으며 80화엄의 대표적인 주석서인 <화엄경수소연의초>80권을 저술 하였고 종밀스님은 불교의 입장에서 유교와 도교를 명확히 사상적으로 정립시키고 징관스님이 주장한 ‘교선일치(敎禪一致)’설을 완성시켰습니다. 화엄교학의 중심사상으로는 성기사상(性起思想)과 법계연기(法界緣起)가 화엄사상을 가장 극명하게 잘 드러내고 있으며, 십현연기(十玄緣起)와 육상원융(六相圓融)은 법계연기의 구체적인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1. 성기사상(性起思想) 성기사상이란 <육십권> 화엄경 성기품(性起品)에 근거한 말로써 요약하면 즉 모든 존재는 여래의 성품이 발현된 것이라고 파악하는 것입니다. 『大方廣佛華嚴經』이라는 경의 제목이 뜻하듯이 삼신(三身)이 원융(圓融)한 비로자나 법신불(法身佛)이 우주존재에 그 빛을 두루 비추이며 동시에 우주의 모든 존재는 비로자나불의 현현(顯現)이 아님이 없으니 이것을 여래출현(如來出現) 또는 여래성연기(如來性緣起) 혹은 줄여서 성기(性起)라고 합니다. 2. 법계연기사상(法界緣起思想) 법계연기는 화엄사상의 철학적 구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존재하는 모든(諸法) 것은 그 어느 것이든지 홀로 있거나 홀로 일어나는 일이 없이 다 같이 끝없는 시간과 공간에서 서로 원인이 되고 대립을 초월하여 조화를 이루어 하나로 융화하고 있으며 한 사물은 개별적인 존재가 아니라 그대로 전우주(一切卽一)라는 뜻입니다. 연화장(蓮華藏)세계라고도 하며 이것은 우주의 통일성에 관한 철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법계연기설은 사법계설(四法界設)과 더불어 십현연기설(十玄緣起說), 육상연기설(六相緣起說) 등의 세계관이 서로 조화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1). 사법계설(四法界設) 화엄교리의 우주의 본체(理)와 현상(事)은 서로 원융할 뿐만 아니라 사(事)와 사(事)도 또한 원융자재하며 우주만유는 그 본체인 일심(一心)으로부터 연기한 것이요 이 연기한 우주만유를 총섭한 것이 일심으로서 서로 주(主)가 되고 반(伴)이 되어 무진연기 하여가는 상태를 네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 것, 이것을 화엄의 4법계라고 합니다. ① 사법계(事法界) 모든 사물이 각기 그 한계를 지니면서 대립하고 있다는 차별적인 현상계를 가리킵니다. ② 이법계(理法界) 우주만유(宇宙萬有)의 실상(實相)은 평등하다는 본체계(本體界)를 말합니다. ③ 이사무애법계(理事無碍法界) 그런데 이러한 현상과 본체는 서로 원인이 되고 융합되어 평등이면서도 차별을 보이며, 또 차별 가운데 평등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④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 현상계(現象界) 만유(萬有)의 낱낱 사물이 서로 장애되지 않고, 중중무진(重重無盡)하게 상융(相融)하며 연기(緣起)를 표현하는 것을 말합니다. 2) 십현연기설(十玄緣起說)과 육상원융(六相圓融) 무진연기(無盡緣起)의 구체적 설명이 십현연기( 十玄緣起)와 육상원융(六相圓融)설입니다. 이 십현연기설은 지상대사의 ‘화엄일승십현문’에서 나온 것인데 진여법계가 인연에 따라 태동해서 차별의 현상을 이루고 이 현상이 연기해서 원융무애(圓融無碍)한 것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갖추어 말하면 ‘십현연기무애법문’ 이라고 합니다. 한편 십현연기설와 더불어 육상원융 또한 화엄무진연기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또다른 측면으로 중시되고 있습니다. 육상이란 총상(總相), 별상(別相), 동상(同相), 이상(異相), 성상(成相), 괴상(壞相)을 말하는데 모든 존재는 다 이 육상(六相)을 갖추고 있으며 이 육상은 서로 다른 상을 방해하지 않고 전체와 부분, 부분과 부분이 일체가 되어 원만하게 융화되어 원융무애한 관계에 놓여 있어 하나가 다른 다섯을 포함하면서도 또한 여섯이 그 나름의 모습을 잃지 않음으로써 법계연기가 성립한다는 설을 말하고 있습니다. |
천태사상 천태의 교리는 중국에서 뿐만 아니라 고려의 대각국사 의천에 의해서 한국의 천태종으로 발전하게 되었는데, 한국의 천태종은 조계종과 함께 선종을 형성하는 특색을 보이고 있습니다. 천태종의 사상은 일본으로 건너가서 천태본각사상을 형성하는등 일본 불교의 교학 형성에 도 큰 바탕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천태의 사상은 화엄 사상과 더불어 대승불교의 형성에 큰 부분을 차지하고 많은 기여를 하였습니다. 1. 천태종의 교학 천태종의 교학은 소위 교관이문(敎觀二門)이라고 하여 이론과 실천으로 조직되어 있습니다. 교는 교판과 교리를 포함하며 관은 소위 지관(止觀)이라고 하는 실천수행 방법입니다. 교의 대표적인 것으로는 ‘오시팔교(五時八敎)’라는 교판을 들 수 있는데 여기에는 일심삼관(一心三觀)이라는 진리관, 그리고 일념삼천(一念三千)이라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시팔교는 천태지의대사에 의해 이루어진 교상판석을 말하는데 교상판석이란 불교의 경전에서 설하는 다양한 교설들을 체계적으로 분류하여 해석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점차 경전이나 철학서에서 설하는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변모하여 각 종파의 소의경전(所衣經典)이 어떤 종파보다도 뛰어남을 논증하는 수단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오시란(五時) 부처님게서 설하신 일체의 경전을 설한 시기에 따라 분류하고 통일한 것으로서 화엄시(華嚴時) 아함시(阿含時) 방등시(方等時) 반야시(般若時) 법화열반시(法華涅槃時)의 다섯 단계로 나누어 배열하고 있습니다. 팔교(八敎)는 불교의 사상과 경론을 나누는 것으로서 크게 설법의 방법과 형식에 따라 돈교(頓敎), 점교(漸敎), 비밀교(秘密敎), 부정교(不定敎)로 분류하는 화의사교(化儀四敎)와 설법의 내용에 따라 장교(藏교), 통교(通교), 별교(別교), 원교(圓교)등으로 분류하는 것을 말합니다. 일념삼천은 오시와 법화경의 절대성을 입증하기 위한 근본적인 세계이론으로써 천태사상의 중요한 특징중의 하나입니다. 절대 진리인 일승묘법을 구체적인 현실에서 나타내어 “한 순간 혹은 한 찰나의 한 마음 가운데 삼천의 세계가 갖추어진다” 라는 세계관입니다. 즉 삼천세계란 일체의 생명체와 사물이 존재하는 우주이며, 역동적인 생성이 이루어지는 세계 전체를 가리키며 이 모든 세계가 한 순간의 우리 마음에 갖추어져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2. 천태종의 지관(止觀)수행 지(止)는 평온함, 조용함, 감정의 제어라는 뜻이며 관(觀)은 명료한 인식, 통찰, 내적 통찰이라는 뜻을 가집니다. 천태수행론에서 지(止)는 모든 번뇌의 끝냄이요, 관(觀)은 자기의 천진심(天眞心)을 관찰하는 것이므로 어지럽게 흐트러진 망령된 생각을 그치고 고요하고 맑은 지혜로 만법을 비추어 보는 일로서 궁극적으로 불성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지관의 체계적인 실천방법에는 삼종지관(三種止觀)이 있고 그 대표적인 원돈지관(圓頓止觀)에는 사종삼매(四種三昧), 십승관법(十乘觀法), 일심삼관(一心三觀)등의 정수행과 이십오방편의 방편행이 있습니다. |
정토사상 인도에서의 정토사상은 약 600부의 대승경전 가운데 정토사상을 설하고 있는 경전이 200여 부에 이르는 것만 보아도 정토사상이 대승불교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정토사상 계열의 경전 중 대표적인 것은 〈아미타경 阿彌陀經〉1권, 〈무량수경 無量壽經〉2권, 〈관무량수경 觀無量壽經〉1권으로 구성된 ‘정토3부경(淨土三部經)’으로서 정토사상의 근본 소의경전이 되며 극락정토가 이루어지게 된 배경과 그곳의 안락함, 그리고 그곳에 왕생할 수 있는 방법 등을 설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토계 경전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의 본원력(本願力)에 의지하여 극락정토(極樂淨土)에 왕생함으로써 불퇴전(不退轉)의 지위에 도달하여 구경(구究境)에 이르러 무상의 보리와 열반을 증득한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도의 정토사상이 중국으로 건너오면서 동진(東晋)시대 남방 여산의 혜원스님(335-417)이 동림사 반야대의 아미타불상 앞에서 123인과 같이 정업을 닦아서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기약하였는데, 이것이 유명한 백련결사이며 정토종의 발원지가 되었습니다. 이후 담란(曇鸞), 혜원(慧遠), 도작(道綽), 선도(善導)대사 등에 의하여 정토사상은 더욱 발전되었고 마침내 정토종(淨土宗)의 성립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라의 원효(元曉), 경흥(憬興), 현일(玄一), 의적(義寂), 태현(太賢), 신방(神昉)대사 등에 의하여 우리나라의 정토사상이 전개되었습니다. 1.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 정토삼부경이란 정토경전 가운데 가장 중요한 세 가지 경전을 통틀어 말한 것으로 〈아미타경 阿彌陀經〉1권 〈무량수경 無量壽經〉2권 〈관무량수경 觀無量壽經〉1권을 말합니다. <무량수경>은 정토사상의 모든 근거를 제시하고 있는 경전으로써 중국 위나라의 강승개가 번역한 상하 두 권의 <무량수경>이 가장 많이 유포되었습니다. 상권은 여래정토(如來淨土)의 인과를 설하고 있으며 하권은 중생들이 극락에 왕생하는 인과를 설하는 중생왕생(衆生往生)을 설하고 있습니다. 즉 여래정토의 원인은 48원(願)이며, 그 결과는 극락정토이고 중생이 극락정토에 태어날 수 있는 원인은 염불이며 염불의 결과는 왕생극락이다 라고 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관무량수경>은 마가다국의 왕비인 위제희부인이 왕궁 깊은 곳에 갇혀 있을 때 석가모니부처님께서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서방정토를 관(觀)해서 왕생할 수 있는 방법을 설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열 여섯가지 관상법을 통해 상중하의 근기들이 모두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관(觀)한다는 말에는 관견(觀見)과 관지(觀知)의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관견이란 극락정토의 아름답고도 불가사의한 장엄을 마음속에 그려 보는 것을 말하며, 관지란 아미타부처님께 귀의하는 절대 신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미타경>은 5세기 초에 구마라집이 번역하였는데 극락정토에 있어서의 여러 가지 공덕장엄(功德莊嚴)을 설하고 있는 경입니다. 이러한 공덕장엄은 국토, 의복, 음식 그리고 육체나 정신에까지 미치고 있으며 이렇게 공덕장엄을 널리 설하는 이유는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극락정토에 왕생하고자 하는 마음을 내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아미타경>은 구회일처(俱會一處)의 사상을 가지고 화합을 도모하고 있어 모든 중생이 마침내는 극락정토에서 모두 함께 만남을 성취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2. 미타의 본원력(本願力) 정토사상은 부처님의 ‘본원력’에 의지한다는 점에서 원시불교의 살아 있을 때의 공덕에 의해 사후에 좋은 세계에 태어난다는 생천사상(生天思想)과 구분되고 있습니다. 본원이란 부처가 깨달음을 이루려고 발심(發心)했을 때 세운 서원을 말합니다. 이 서원은 자신이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을 증득함과 동시에 다른 모든 중생들도 자신과 같은 깨달음을 이루도록 하겠다는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서원입니다. 그래서 아미타불은 자신이 성취할 부처의 깨달음이 성불의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이는 중생이라 할지라도 그들을 제도할 수 없는 것이라면, 깨달음을 이루지 않겠노라는 서원을 세웠습니다. 본원력이란 바로 이러한 불보살의 이타적 구원의 원력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처의 본원설은 〈무량수경〉에서 48원(四十八願)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아미타불이 법장비구였을 때 세웠던 이 서원들 가운데 제18원은 '미타본원'(彌陀本願)이라 하여 특별히 중시되고 있는데 그 내용은 "시방중생이 지심(至心)으로 신락(信樂)하여 나의 나라에 태어나고자 원한다면 오직 십념(十念)만 할 것이니, 그럼에도 나의 나라에 태어나지 않는다면 나는 정각(正覺)을 이루지 않겠다" 라는 것입니다. 3. 정토와 왕생 정토사상의 중심 과제는 ‘정토’와 ‘왕생’에 있습니다. 왕생은 정토로 가서 태어난다는 뜻이며 정토란 부정잡예(不淨雜穢)가 사라진 청정한 불국토(佛國土)이며 즐거움만이 충만된 극락세계를 가리킵니다. 경전에는 아미타불의 서방정토 외에도 미륵보살의 도솔천정토(兜率天淨土), 약사여래의 유리광정토(瑠璃光淨土)등 여러 정토가 설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가운데 가장 수승한 것은 아미타부처님의 서방정토라고 찬탄하고 있습니다. 아미타불은 무량한 수명과 광명(光明)을 가진 부처라는 뜻으로써 정토에 태어난 사람들은 무량한 수명과 광명의 공덕 속에 있게 되며, 부처와 같은 깨달음을 얻는 데 어렵지 않고, 불퇴전지(不退轉地:뒤로 물러서지 않는 깨달음의 자리)의 경지에 이르러 보처(補處)가 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정토사상은 정토에 왕생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
선사상(禪思想) 선(禪)이란 말은 고대인도의 산스크리트어 ‘드야나’(dhyana)와 팔리어의 ‘쟈나’(jhana)를 음역한 ‘선나’(禪那)를 줄인 말로서 원어는 ‘마음을 통일하는 것’, ‘마음을 특정한 것에 집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의역해서 ‘정려(靜慮)’, ‘사유수(思惟修)’라고도 하는데 부처님께서 출세하신 후 깊은 사유와 정각(正覺)을 통해 불교의 깨달음을 얻기 위한 실천 수행인 ‘선정(禪定)’으로 체계화 되었습니다. 1. 중국선의 전개 인도에서 불교가 발생하고 점차 발전함에 따라 그것은 소승(小乘)과 대승(大乘)의 두 파로 구별되어 중국과 우리나라, 일본에 전래되었습니다. 선(禪) 또한 인도에서 발생하였으나 중국에 와서 한층 더 새로운 발달을 이룩하고 독자적인 전통을 형성하였습니다. 우리가 선사상(禪思想)이라고 부르는 것은 좁은 의미로 중국선종의 사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중국선의 발달은 남조시대(南朝時代) 인도의 보리달마(菩提達磨)스님이 양나라로 건너와 전한 대승선법이 육조(六祖) 혜능스님을 거쳐 마조스님에 이르러 중국 고유의 조사선으로 발전하면서 크게 꽃피우게 되었습니다. 달마스님은 중국선종(禪宗)의 초조(初祖)로 남인도(일설에는 페르시아) 향지국(香至國)의 셋째 왕자로 태어나 대승불교의 승려가 되어 선(禪)에 통달하였으며 스승인 반야다라존자로부터 법을 부촉 받아 520년경 중국으로 건너오게 되었습니다. 당시 양무제와의 문답을 하였으나 아직 중국에서 불법을 펼 시기가 아님을 알고 북위(北魏) 동쪽의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에서 9년간 면벽좌선(面壁坐禪)하였습니다. 때가 이르러 “사람의 마음은 본래청정하다는 이치(理致)를 깨달아야 한다” 고 주장하고 이 선법(禪法)을 제자 혜가(慧可)에게 전수하였습니다. 달마스님의 대승선법은 반야사상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벽관(壁觀)의 실천으로 새로운 경지를 열었습니다. 달마스님의 가르침은 이입사행(二入四行)으로 총괄되는데, 이입사행이란 도(道)에 들어가는 요문으로서 이입(二入)은 도에 이르는 두 가지 길을 나타냅니다. 즉 이입(理入)과 행입(行入)을 이르는 것입니다. 1). 이입(理入) 경전을 탐구하여 철저히 깨달아 진리에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중생이 동일한 진성(眞性)임을 믿고, 참된 성품이 번뇌에 가려 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을 얻으면 진리와 하나가 되어 분별이 사라지는 세계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2). 행입(行入) 실천에 의한 입문을 뜻합니다. 행입은 다시 보원행(報寃行), 수연행(隨緣行), 무소구행(無所求行), 칭법행(稱法行)의 네 가지 규범으로 나뉩니다. ① 보원행 증오의 과보(果報)를 갚는 규범이다. 즉 증오가 자신이 과거에 지은 업(業)의 과보임을 깨닫고 인간 본래의 도를 닦는 것을 말합니다. ② 수연행 삶의 여러 조건에 따르는 규범을 말합니다. 고통과 즐거움, 슬픔과 기쁨은 모두 업의 인연에 의한 것이므로 집착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③ 무소구행 집착을 버리는 규범입니다. 집착을 버리고 구하는 바가 없는 것이 도에 들어가는 첫걸음임을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④ 칭법행 진리에 따라 살아가는 규범을 말합니다. 모든 중생이 본래 청정하다는 것을 믿고 자리이타(自利異他)를 행하며, 얻음을 바라지 않는 무소득에 철저함을 뜻합니다. 2. 중국선의 발전과 전승 달마선법은 초조(初祖) 달마스님 이후 육조혜능스님과 신수스님에 의해 남종선과 북종선의 양대 산맥을 이루게 되고 남종선은 다시 사자상승(師資相承)의 가풍에 바탕으로 하여 오가칠종(五家七宗)으로 나뉘어 발전하고 눈부신 선(禪)의 찬란한 황금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오가칠종은 임제종, 위앙종, 조동종, 운문종, 법안종과 송대에 임제종에서 분리된 화룡파와 양기파를 말합니다. 이 가운데 임제계(臨濟系)과 조동계(曹洞系)가 후대까지 번영하여 오늘에 이르렀으며 간화선(看話禪)과 묵조선(黙照禪)의 선수행법이 선양되었습니다. 조동계의 가풍을 이은 굉지선사는 묵조선을 크게 발전시켰으며 임제계 양기파의 대혜선사에 의해 대성돤 간화선은 화두를 참구하여 크게 깨닫게 하는 선풍으로 오늘날까지도 그 선풍이 이어지고 있으며 중국선종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화두란 공안(公案)이라고도 하는데 조사(祖師)들이 정한 설(說), 언구(言句), 문답등 불조(佛祖)와 인연된 종강(宗綱)등을 선(禪)의 과제로 삼아 참구하여 오경(悟境)에 이르는 참선법으로서 현재 공안이 1700개가 전해진다 하여 1700공안이라고 합니다. 가장 중요한 공안집으로는 1125년에 중국 원오스님이 그전부터 있던 공안집에서 100개 정도를 가려내어 편집, 주석한〈벽암록 碧巖錄>과 1228년에 중국 혜개스님이 48개를 선별하여 모은〈무문관 無門關>이 있습니다. 중국선종의 특징은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을 종지로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선의 입장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말이라 할 수 있으며 선종(禪宗)에서 말이나 문자를 쓰지 않고 따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진리를 전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즉 불법(佛法)의 진수는 어떤 경전의 문구에도 의하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직접 체험에 의해서만 전해진다고 것을 말합니다. 표월지(標月指: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의 비유에 잘 나타나 있듯이 진리(眞理)를 달에 비유한다면 교(敎)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지나지 않으며, 이에 반해 선(禪)은 달을 직접 체험하는 것이라고 비유합니다. 이와 같이 불교의 다른 종파(宗派)가 모두 교내(敎內)의 법을 가르침에 반하여, 선종에서만은 교외(敎外)의 법을 주장하는 것이 가장 뚜렷한 특징입니다. 우리나라의 선법은 역사적으로 보면 신라의 법랑(法郞)대사가 달마대사로부터 4조인 도신(道信)선사에게 최초로 법을 받았는데 이는 북송(北宋)의 선인 조동종의 묵조선을 위주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6조 혜능(慧能)대사로부터 남악(南嶽)·마조(馬祖)·백장(百丈)·황벽(黃檗)선사의 법맥이 임제(臨濟)의현(義玄)선사에 이르러 일가(一家)를 이루게 되었는데 이 임제종의 간화선이 신라시대 보조국사를 거쳐 태고보우국사를 통해서 비로소 한국불교 선종의 가풍으로 확립하게 되었고 현재까지 이어져 한국선불교의 대표적인 수행법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