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신문 2022신춘문예 소설부문 가작
바즈라체티카
이석준
쾅쾅쾅쾅쾅... 펑펑펑펑펑... 번쩍번쩍번쩍...
일요일 늦은 밤 12시가 다 되어 종로에 있는 호프집 알바를 마치고 회기역 앞 반지하 자취 방으로 돌아온 경민은 조금은 여유로운 마음으로 리모컨의 뉴스 채널을 눌렀다. 때마침 뉴스 화면에서는 전날 팔레스타인의 로켓 공격에 대응하여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대한 미사일 침공 소식을 속보로 알리고 있었다. 민간 지역이 많은 가자지구에 수없이 날아드는 미사일 야간 공격으로 인하여 귀가 찢어지는 듯한 굉음과 날벼락을 맞는 듯한 섬광들. 통째로 무너진 건물에서 끝없이 실려 나오는 사망자들, 팔다리가 찢겨진 채로 옮겨지는 부상자들, 이어서 터져 나오는 가족들의 피맺힌 울부짖음.
경민은 할 말을 잊은 채 이 장면들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아! 아비규환을 보는 것 같다. 정확히 뜻은 모르겠지만 경민의 뇌리에 번갯불처럼 떠오르 는 단어인 아비규환.
잠시 후 무거운 마음을 돌리고자 누른 또 다른 뉴스 채널에서는 우리들에게 유명한 아웅산 수치 여사를 감금하고 쿠데타를 일으킨 미얀마 군부의 만행을 알리고 있었다.
TV 뉴스는 부정선거에 대한 조사라는 명분으로 일으킨 군부 쿠데타로 인하여 수백 명의 무고한 시민들이 학살당하고 있음을, 군경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시민들이 몽둥이로 두들겨 맞으며 개처럼 끌려가고 있음을, 이런 상황 속에서도 군부에 저항하는 의지의 표현인 손가락 세 개는 끝까지 항전하겠다는 미얀마 시민들의 굳은 결의의 표현임을 상세히 보도하고 있었다. 이 뉴스를 보며 불현듯 떠오르는 또 하나의 단어, 아수라장. 연이어진 비통한 뉴스를 접한 경민은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아!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 과연 무엇을 위한 쿠데타인가? 진정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저 용기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는 TV를 끄고 마음을 추스르기 위하여 잠시 밖으로 나왔다. 마치 거대한 미지의 숲속에 갇힌 듯 희뿌연 고층의 건물들이 그를 에워싸고 있었으며, 앞 건물 한쪽 구석에서 웅크리고 있던 고양이의 시퍼렇고 섬뜩한 눈빛을 애써 피하며 그는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경민은 늦은 시간임에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뇌리를 가득 메우고 있는 뉴스 장면들. 아비규환, 아수라장.
그는 밤새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다 어스름한 새벽에야 잠이 들 수 있었다.
다음날 밖이 훤해져서야 눈을 뜬 경민은 오늘 월요일 오전 수업이 없음을 알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동국대 역사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인 경민은 부모님의 부담을 덜어드리고자 교내 동아리인 고궁투어의 2년 선배인 불교학과 민철의 소개로 종로에 있는 호프집에서 주말 야간 알바를 1년 넘게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월요일 오전 수업을 모두 오후로 몰았던 것이다. 전철을 타고 학교로 가면서 경민은 여느 때와는 다르게 핸드폰을 보지 않고 어제의 충격에서 벗어나며 곰곰이 깊은 상념에 젖어 들었다.
‘중동지역에서의 분쟁은 오랜 역사 속에서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는 일이다. 하도 자주 분쟁이 일어나다 보니 우리 국민의 입장에서는 그저 강 건너 불이 난 것과 같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같은 아시아권 미얀마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우리나라도 이미 40년 전에 광주 민주화 운동을 겪지 않았던가? 어찌하여 이스라엘과 아랍 민족은 평화롭게 살 수 없는가? 어찌하여 미얀마는 군부 쿠데타의 악순환을 계속해야 하는가? 어찌하여 후진국 국민들의 상당수는 기아와 질병의 고통 속에 신음해야 하는가?’
동국대역에서 내려 교정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던 경민은 6월의 캠퍼스를 바라보았다. 모든 초목들은 작열하는 태양 아래 그 싱그럽고 교교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고, 푸르른 하늘과 순백의 구름은 마치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 듯 아련했으며, 훈풍인 듯 휘감기는 청량한 바람이 지친 몸을 어루만져 주고 있었고, 경사진 교정을 힘차게 오르고 있는 청년들의 모습이 조화롭게 어우러지고 있는 광경은 어제 밤과는 너무도 다른 세계에 와 있다는 묘한 착각에 빠져들게 하고 있었다.
잠시 후 구내식당에 도착한 경민은 반가운 얼굴을 만날 수 있었다. 바로 미얀마에서 유학생으로 동국대에 온 같은 학과 동급생인 미칸 지였다. 그녀는 경민을 보며 눈인사를 보내었다. 경민은 평소 때와는 다르게 그녀에게 친근하게 인사를 건넸다.
“미칸 지, 지금 걱정이 많지? 미얀마 사태가 하루속히 정상화되기를 바래.”
한국말 실력이 뛰어난 그녀는 비장한 표정으로 이렇게 답했다.
“한국이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서 온 국민이 민주화를 위해 투쟁했던 것처럼, 우리도 지금 군부쿠데타를 극복하고 민주주의를 쟁취하고 말거야.”
그러면서 그녀는 손가락 세 개를 편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는 미얀마 민주화 운동의 상징으로서, 군부독재 저항, 군부 반대, 불복종 운동을 표현하는 것이라 설명해 주었다. 식사를 같이 하며 경민은 미칸 지에게 어제 TV를 보며 너무나도 비극적인 참상에 아비규환과, 아수라장이라는 단어들이 떠올랐다고 말하며, 자세히는 뜻을 모르겠으나 불교에서 유래된 용어가 아닌가 물었다. 아버지가 미얀마 양곤대 교수여서 어렸을 적부터 불교 공부를 많이 했다는 그녀는 이렇게 답하였다.
“그래 경민의 말대로 아비규환, 아수라장 두 단어의 어원은 불교에서 온 것이 맞아. 사실 우리가 쓰고 있는 용어 중에서 불교에서 유래했음에도 모르는 것들이 꽤 많아. 예를 들면 지금 우리가 먹고 있는 식사를 점심이라고 하잖아. 이 말 또한 불교 선종(禪宗) 에서 온 말이야.”
미칸 지와 헤어지고 오후 수업을 마친 경민의 귓가에는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용어들 가운데 불교에서 온 것들이 의외로 많다는 미칸 지의 이야기가 맴돌고 있었다. 경민은 한 번 궁금한 것이 생기면 그 답을 얻을 때까지 노력하는 성격이었다. 강한 호기심을 느낀 경민은 동아리 선배이자 불교학과 4학년으로서 대학원 진학 준비를 하고 있는 민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민철이형, 궁금해서 그러는데 아비규환, 아수라장, 점심 이런 말들이 불교에서 유래 했어?”
“경민이 너 이제야 그걸 알았어? 우리가 무심코 사용하는 용어 중에 불교에서 유래한 것들이 무척이나 많아. 내가 몇 개만 알려 줄게. 이판사판, 무진장, 주인공, 강당, 식당, 건달, 노파심 등등 셀 수 없이 많이 있어.”
민철의 설명을 들으며 경민은 속으로 적잖이 놀라고 있었다.
“형, 오늘 저녁에 시간되면 한번 보자. 동아리에서 만난 후로 얼굴 본 지도 좀 오래 됐잖아. 오늘 저녁 내가 살께. 불교에서 유래한 용어 목록 하나 만들어 주라.”
“오케이, 안 그래도 오늘 저녁 약속이 펑크났는데 잘 되었네. 오랜만에 경민이 쏘는 술 한 번 얻어먹어 볼까? 아니지, 그걸 로는 약하지, 경민아 2차까지 쏴라 콜?”
“그래요 형, 7시에 종로 골목집에서 봐요.” “그래 이따가 보자.”
초저녁의 술집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이들은 이 근처 사무실에 근무하는 직장인들로서 30-40대가 주로 대부분이었다. 약속 시간보다 10여 분 일찍 도착한 경민은 핸드폰으로 오늘의 뉴스를 검색하려는데 주위에서는 이런 이야기들이 들려오고 있었다.
“친구야, 이번에 아파트 샀다며 축하한다. 몇 평이야?”
“응, 24평. 대출을 좀 무리하게 받았어. 먼저 살던 집 주인이 전세금을 삼천만원이나 올려 달라잖아. 그래서 와이프랑 상의해서 이번에 집을 사게 됐어.”
“암튼 축하해. 대출도 능력이잖아.”
“아이고, 집 대출이자에 자동차 할부까지 감당할 생각하니 괜한 일을 저지른 것 같아.”
또 다른 테이블에서는 아이들 교육 문제로 열을 올리고 있었다.
“나는 이번에 큰 애 학원을 중계동으로 옮겼는데 그 학원 인기가 장난이 아니야. 강북에서 스카이 입학 실적이 탑이래. 아주 세게 가르치는 곳이라 하더라고.”
“그러냐, 나한테 그 학원 좀 자세히 알려 주라. 우리 애도 그리로 옮겨야겠다.”
앞좌석의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두 사람의 분위기는 마냥 어둡기만 했다.
“너는 이번에 몇 번째야?”
“응, 세 번째 낙방이야. 너는?”
“나는 두 번째. 집에 눈치 보여서 용돈 달라는 소리도 못 하겠어. 내년에는 노량진으로 가야 할까 봐.”
“거기 간다고 공시 합격한다는 보장도 없잖아?”
“그러게 답답하기만 하다. 술이나 마시자.”
민철이형이 아직 도착하지 않아서 마지못해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경민은 지금의 현실이, 앞으로의 미래가 암울하기만 했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촌의 중동에서, 미얀마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음에 도 이곳에 있는 단 한사람도 이런 얘기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씁쓸하기만 했다. 민철이형은 약속 시간보다 20분 늦게 도착했다.
“경민아 미안. 내가 좀 늦었네. 여기 오려는데 학과장 교수님으로부터 호출이 와서. 대학원 가면 조교 자리 부탁드렸었거든.”
“교수님이 뭐라 그러셔?”
“응, 잘 될 것 같으니 석사논문 준비 잘 해보라고 하시네.”
“민철이형 잘 됐네. 오늘 술은 형이 사야 되겠네.”
“그래도 오늘은 아니지. 그런데 너는 어떻게 불교 용어에 관심을 갖게 된 거야?”
경민은 민철에게 어제 밤부터의 일을 설명해 주었다
“응, 그래서 그 단어들을 물어 본 거구나. 그런 일들이 일어난 것은 정말 슬픈 현실이야. 각 나라마다 복잡한 사정이야 있겠지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전쟁은 근본적으로 영토 분쟁이 핵심이야. 그리고 미얀마 사태는 국민들에게 권력을 넘기지 않으려는 군부의 탐욕 때문이고. 그나저나 모두들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느라 남의 어려움에는 관심도 없는데 너는 타민족의 불행으로 인하여 잠도 못 이루고 괴로워하고 있으니 대견하구나.”
“아니야, 민철이형 나는 그냥 조금 충격을 받은 것뿐이야.”
민철은 조금은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경민아, 불교에서는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정신을 강조하고 있어. 즉 타인을 위하는 마음이 공덕이 되고, 그 공덕은 다시 자신에게 돌아와 결국 자신과 타인이 모두 행복해진다는 상생(相生)의 원리를 담고 있는 말씀이지.”
“그런데 민철이형, 보통 우리들은 먼저 자신을 위하고 행복해져야 그 다음에 타인을 위할 수 있는 거잖아?”
“응, 그 부분이 불교가 다른 종교의 가르침과 비교되는 핵심적인 부분이야. 좀 더 깊게 들어가자면 모든 우주만물은 서로 의지하며 존재한다는 상의상관의 연기사상이 불교의 핵심이야.”
듣고 있던 경민은 처음 접하는 용어들인지라 생소함을 느꼈다.
“근데 형, 내가 부탁한 불교 용어 목록은 가져 왔어?”
“응 가져왔지, 공짜 술을 얻어먹을 수 있나.”
김치찌개와 파전, 그리고 소주 2병을 나눠 마신 그들은 2차로 근처 호프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판사판 야단법석 늦깍이 무진장 주인공 아비규환 아수라장 강당 식당 건달 아귀 나락 다반사 기특 대중 살림 탈락 찰나 현관 출세 불가사의 언어도단 유명무실 유야무야 자업자득 노파심 점심 이심전심’
민철이 경민에게 보여준 용어해설 중 제목들이었다.
“형, 이렇게 많았어?”
“야, 이것 말고도 많아. 너 장로, 집사, 전도라는 말 알지?”
“그럼, 기독교에서 쓰는 말이잖아?”
“흐흐흐, 그 말들도 사실 불교에서 유래한 말들이야.”
“어, 그래? 근데 왜 그 말들이 기독교 용어가 되었지?”
“말은 시대와 환경에 따라 변하잖아. 해방 후 기독교 교세가 급속도로 확장하면서 교인들이 그 말들을 많이 사용하게 되면서 기독교 용어로 굳어지게 된 거지.”
“그게 그렇게 된 거구나. 그런데 민철이형, 여기 먼저 와서 형을 기다리면서 느낀 점인데 이곳에 있는 분들은 어제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서 모두들 무관심한 것 같아.”
민철은 지긋한 눈빛으로 경민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너는 선한 성품이라 남들은 자신들의 일이 아니라고 무심히 넘기는 일들에 그토록 충격을 받았구나. 그래, 우리나라도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 때, 많은 국민들이 희생당했었지.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경제 발전과 민주주의에 대한 자부심도 다 그런 위기를 극복한 국민들의 위대함 덕분이지.”
“하지만 민철이형, 지금은 지금대로 갈등과 대립이 너무 많잖아. 사는 것은 물질적으로 풍족해 졌을지 모르지만 빈부갈등, 남북갈등, 남남갈등, 남녀갈등, 지역갈등 등 온통 서로를 비난하고 갈등, 대립하고 있잖아.”
경민의 말을 잠잠히 듣고 있던 민철은 갖고 있던 불교용어 해설 리스트를 주며 이런 말을 툭 던지는 것이었다.
“그래,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는 종교가 큰 역할을 해야 함에도 우리 불교는 기독교나 천주교에 비해서 대사회적 역할이 많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야. 하지만 아시아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관심을 받고 있는 참선이나 명상에서 그 답을 찾을 수도 있을 거야. 현재 한국불교의 장자격인 조계종, 태고종에는 소의경전(所依經典)인 금강경(金綱經)이라는 대승경전이 있어. 아까 네가 말한 점심이라는 말도 이 경전에서 유래된 거야. 오늘 저녁 거하게 얻어먹었으니 나도 너에게 선물 하나 보내마. 현재 불교계 최고 스테디셀러인 무위 스님의 금강경 해설서 한 권 보낼게. 이번 기회에 경민이 네가 불교를 이해하고 깊은 뜻을 알게 됐으면 좋겠다.”
민철과 헤어지며 경민은 자신에게 호프집 알바를 소개시켜 주었고, 항상 후배들을 챙겨주는 선배의 넓고 따뜻한 마음을 닮고 싶어졌다. 그리고 인연이 된 불교를 제대로 배우고픈 마음 또한 간절해졌다. 그 날 저녁, 경민은 민철이 준 리스트 가운데 우선적으로 궁금한 단어 몇 개를 추려서 용어 해설을 들여다보았다.
이판사판(理判事判):이판(수행하는 스님)과 사판(교화를 맡은 스님)을 합쳐 부르는 말. 주인공(主人公): 불교에서는 심오한 진리를 깨닫게 됨을 ‘득도’라 하는데 이같은 깨달음을 얻은 이가 바로 주인공임.
아비규환(阿鼻叫喚): 끔찍함이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상태. 주로 전쟁, 학살 등과 같은 인간들의 범죄 행위나 자연 재해를 표현할 때 사용하는 말. 아비지옥과 규환지옥의 합성어임.
아수라장(阿修羅場): 전쟁이나 천재지변 등으로 큰 혼란에 빠진 곳. 불교에서 아수라는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천신 중 하나임. 불교에 처음 수용했을 때는 불법을 지키는 천룡팔부 중의 하나로 선신(善神)이었음. 그 후로 하늘세계의 왕인 제석천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이후 증오심이 넘치는 전신(戰神)이 되었다고 함. 제석천이 아수라와 싸울 때 사용하는 무기를 바즈라(vajra)라고 하며, 벼락을 의미함.
점심(點心): 낮에 먹는 식사를 의미함. 불교 선종에서 본 식사 사이에 먹는 간식을 가리키 는 말. 공복(空腹)에 점을 찍듯이 먹는다는 것 을 뜻함.
용어 해설을 보며 경민은 오랜 세월 불교가 우리의 현실 생활과 얼마나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다음날 저녁, 민철이 보내준 금강경 해설서를 받아든 경민은 기대와 걱정이 교차하며 천천히 책장을 넘겨 나갔다.
그 후로 한 달 동안 금강경 공부에 전념하던 경민은 당대의 대강백이신 무위 스님께서 초심자들을 위해 비록 쉽게 해설해 주셨지만 수없이 많은 의문과 어려움 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특히 금강경 전문에 걸쳐 수없이 등장하는 구절. A 즉비(卽非) A, A 시명(是名) A
반야바라밀 즉비반야바라밀 시명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卽非般若波羅蜜 是名般若波羅蜜) 반야바라밀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라 이름이 반야바라밀이니라.
쉬운 것 같으면서도 도통 알 수 없고, 환해지는 것 같으면서도 다시 먹먹해지고, 번쩍하고 떠오르면서도 결국 가라앉는, 그야말로 진흙탕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심정이었다.’
한 번 마음먹으면 한 달이고 두 달이고 문제를 풀 때까지 집중하며 포기하지 않는 경민이었지만 보이지 않는 거대한 벽에 부딪힌 듯, 끝도 모를 나락에 떨어진 듯 심연(深淵)의 세계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과연 초심자인 내가 이 심오한 경전을 믿고, 이해하고, 실천하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깊은 회의